이 밤 서울엔 불빛이 푸르고 / 나 한 줄의 시 되어 당신께 안기리
scenario
2021. 11. 18. 19:21
크툴루의 부름 7판 동인 시나리오
헤르츠 (@919MHz)
시나리오 후기, 플레이 타임 수집 폼 : forms.gle/Gzh6oxw84dBqpPZE9
언어가 필요치 않은 순간들. 문자가 사람에게 가지는 깊은 보고들. 이 순간의 서울은 글자로 직조된 모든 것들에 다정하다. 연인들은 시에 열광한다. 문학의 아름다움을 숭배하고, 그것을 깊이 이해하며, 앞다퉈 더 면밀한 골조를 가진 문장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가 개입하거나 막을 수 없는 일이다. 글쓰는 자의 사고는 눈을 깜빡이거나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히 하나의 흐름을 가진 문장 되어 뇌리를 스친다. 그것을 옮겨 적는 일이 비로소 글쓰기이므로 근본적으로 작문이란 오로지 생각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 그러니 생각해 보자. 언어로 기술된, 가장 강력한 문장이 무엇일까? 수없이 읽혔으며 무수히 되풀이되어 누구나 그것을 알고 있는 단 하나가 무엇일까? 그것만이 이 시를 이길 수 있다.
개요
추천 플레이리스트
https://www.youtube.com/watch?v=3MMi0sYzSek&list=PL24DLC9XtnLhgCl3jtGkgA14XRO_PooDv
서울시 관광 스탬프 투어에 참여하게 된 KPC와 PC. 남산타워, 연남동, 종로와 덕수궁, 서촌, 이화동, 명동 등을 관광하며 다양한 체험을 하자고 약속했습니다. 일정 첫날, 남산타워에서는 아름다운 유성우를 조망할 수 있다는 기상 예보가 들려오고,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쌀알 같은 별들을 올려다보며 미래를 약속합니다.
그러나 운치 있는 관광도 잠시, 최근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작가 ‘유진’과 얽히며 두 사람은 서울을 배경으로 한 여러 문학의 한 장면 속으로 트립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김영일과 김중태가 시문학을 논하고, 천상병이 골목길 어귀를 지나며, 전혜린이 차분한 필붓으로 독어를 번역하는 1960년의 어느 한 순간, 혹은 소설가 구보 씨가 청계천변을 걷고 이경과 옥희도가 서촌을 흐르는 1900년대초의 풍경. 과연 ‘유진’은 누구일까요? KPC와 PC가 서로 강렬히 이끌린 까닭에 세상이 안배한 운명과 시간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먼 미래에, 우리를 이토록 가슴 저리게 하는 문학은 어떠한 위치에 있을까요?
주의사항
주요 소재/키워드 : 서울, 문학, SF, 시간여행
인원 : KPC 1인 & PC 1인 (대한민국에서 중등교육 이상을 수료하였고, 문학사에 관심이 있다거나 관련 전공/직업이라면 아주 좋음)
추천 관계 : 연인 권장
배경 : 2021년, 대한민국 서울
플레이 시간 : 4~8시간 (RP량에 따라 아주 달라짐)
플레이 난이도 : ★☆☆☆☆
키퍼링 난이도 : ★★★☆☆
전투 가능성 : O
광기 가능성 : O
추천기능 : 역사, 모국어
아래로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시나리오 본문이 시작됩니다.
진상
2021년 겨울, 명왕성에서 일어난 폭발 잔해가 마침내 지구로 내려온 날 북반구에 유성이 관측됩니다. 그 유성 중 하나가 한강으로 떨어져 운석이 됩니다.
본래 역사에서 이 운석에는 <우주에서 온 색채(p.301)>가 묻어 있었고, 색채가 생명력을 흡수한 결과 인류의 절반이 소멸됩니다. 간신히 다시 정부를 일구고 생활 터전을 만들었으나, 많은 문화와 역사가 이 시점에 소실되었습니다. 특히 한국문학은 운석이 떨어진 곳이 서울이었던 영향으로 인해 거의 절멸 수준으로 사그라들었습니다.
수백년 후, 문화가 사멸된 시대, 사람들이 아무도 문학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 곤궁하던 시인 ‘유진’. ‘유진’은 생계를 위해 시공관리국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시공관리국은 이스족과 협업을 체결, 이스족의 기술을 이용해 소실된 역사의 과거로 내려가 역사를 탐방하고 그 기록을 연구합니다. ‘유진’에게 내려진 이번 임무는 서울을 여행하며 당시의 문화와 역사를 습득해 돌아오는 것. 그러나 문학이 주목받지 못하는 세태에 절망하던 ‘유진’은 2021년의 서울로 내려와 자신이 운석을 줍기로 하고, 운석에 깃든 힘을 이용해 사람들이 문학을 숭배하도록 만들자는 계획을 세웁니다.
‘유진’은 2021년으로 도착하여 다양한 문화와 문학을 체험하며 임무에 충실한 척하는 한편 자신의 계획을 다듬기 시작합니다. 2021년 서울, KPC와 PC가 참가하게 된 서울시 관광 스탬프 투어는 하스투르의 신도들인 ‘황색 징표의 형제들(p.335)’이 ‘황색의 징표’를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시키기 위해 꾸민 일입니다. 미래에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고자 ‘형언할 수 없는 존재들의 과거 소환 기록’을 연구 중이던 시공관리국을 통해 이것을 알고 있었던 ‘유진’은 이 계획을 역이용, 스탬프 투어에 노출되어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자신의 문학을 숭배하게 하고자 그 경로를 역추적하며 사교도들의 계획을 조사합니다.
‘유진’은 운석의 힘을 빌어 <문창성의 펜>이라는 아이템을 만듭니다. (*‘문창성의 붓’ 설화에서 인용) 재능 있는 인물이 이 펜을 이용해 무언가를 필사하거나 새 작품을 적으면, 그 작품은 글 자체로 어떤 전거가 되어 힘을 가지게 됩니다. ‘유진’은 미래에는 실전된 2021년의 다양한 문학 작품들을 필사하고, 근원이 같은 KPC, PC의 존재와 공명하며 이상 현상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유진’의 계획으로 인해 서울이 엉망진창으로 변한 와중 KPC와 PC만이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본질적으로 KPC, PC가 모두 명왕성에서 기원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모두 별에서 온 존재라는 말이 있습니다. KPC와 PC의 대과거를 거슬러 올라 모든 전생을 거듭해 살피면, 최초의 시작은 명왕성에서 지구로 날아온 어느 작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지성을 갖추었으나 역사의 기록에서는 사라진 어떤 고등생물체였을 수도 있고, 자아가 없이 그저 물결에 흔들리는 것으로 진화를 증거하는 미생물이었을 수도 있지요. ‘유진’의 기이한 힘 역시 2021년에 지구로 내려온 명왕성의 운석으로부터 기인한 것. 이 거대한 우주의 논리 속에서 근원이 같은 것들은 서로의 정신에 해를 끼치지 못합니다.
여러 사유로 ‘유진’과 KPC, PC의 행보가 겹친 것은, 시작에는 단순히 스탬프 투어를 좇아 가던 양 팀의 경로가 동일했던 탓이지만 일단 마주친 후부터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유진’은 사실 KPC와 PC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낳은 아이의 후손일 수도 있고, 인구수가 부족해진 미래에 KPC와 PC의 흔적에서 체취한 유전자 합성으로 태어난 아이일 수도 있습니다(각 탁의 설정에 따라 정해 주세요. ORPG 환경에서 ‘유진’의 외모를 두 사람과 닮게 설정해 출력한다면 재미있는 연출이 될 것입니다. 우선 이 시나리오 내에서는 후자의 설정을 채택합니다). ‘유진’은 이성을 유지하며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는 KPC와 PC를 해치려 하지만, 그들이 사라지면 ‘유진’의 존재 역시도 부정되기에 세계의 억지력이 두 사람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과 자신 사이에 얽힌 진실을 알아챈 ‘유진’. 그는 자신의 첫 어머니 된 자를 없앨 수 있을까요?
KP 정보 NPC가 ‘유진’인 까닭은 ‘유진’이 아주 다양한 문화권에서 동시에 사용되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의미가 있는 조형이므로 가능한 변경하지 말아 주세요.
남산 : 일천 개의 유성우가 떨어지는 밤
사람들이 코트 깃을 세우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가을 밤, 남산공원.
서울시가 주관하는 문화 스탬프 랠리에 참여하기로 한 KPC와 PC의 첫 데이트 장소는 남산타워. 오늘은 해가 질 무렵 관측 이래 최대 규모의 유성우가 내린다는 예고가 있었습니다. 명왕성에서 일어난 폭발의 잔해가 우주를 떠돌다 마침내 지구로 접근한 것입니다. 이 낭만적인 순간의 관찰을 위해 많은 시민들이 다양한 야경 명소에 올랐습니다. 어깨를 감싸쥔 연인들이 보폭을 맞춰 길을 거닐고,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은 부모가 천천히 오르막길을 오릅니다. 두 사람이 연인이라면 이름을 적은 자물쇠 걸기를 해도 재미있겠네요. 일몰을 기다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시다.
남산타워를 뒤로 한 공원의 전망대 난간 앞에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취재를 나온 방송사의 기상 캐스터도 보이네요. 저마다 소중한 사람을 품에 안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가운데, 마침내 쌀알처럼 아름다운 유성우가 씨앗을 터뜨리듯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공원 스피커에서 라디오 중계가 들려오네요.
“인간은 모두 별에서 온 존재들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지요. 이 로맨틱한 밤, 명왕성에서 도착한 옛 소식은 서울 시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습니다.”
유독 궤적이 길었던 유성우 하나가 한강 방향으로 향했을 때 시민들은 즐거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원을 빌어도 좋고, 사진을 찍어도 좋겠습니다. 날이 저물 때까지 유성우는 끊이지 않고 감색 대기를 적십니다.
광화문 : 문장은 친밀하게 우리를 감싸 안고
며칠 뒤, 광화문 교보문고.
스탬프 투어의 이번 스팟은 역사 깊은 종로 1번지와 그 곁에서 흐르는 물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교보문고를 거쳐 청계천을 방문할 계획을 세운 KPC와 PC는 서점을 둘러보며 다양한 대화를 나눕니다.
그런데 서점 내부에 난리가 나 있습니다. 신설된 베스트셀러 코너는 배너와 현수막을 세워 작품의 대단성을 강조하고, 사람들은 흥분한 채 줄을 서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 본 두 사람은 이 인파가 최근에 몹시 화제가 되어 신드롬을 일으킨 한 시인 때문이라는 정보를 얻게 됩니다.
문학이나 SNS의 흐름에 관심이 있는 PC라면 별도의 판정 없이, 그렇지 않은 PC라면 지능 판정을 통해 스치듯 본 화두를 떠올리거나 자료 조사 판정을 통해 검색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갑작스럽게 발굴되어서 난리가 났었죠. 출판사가 홍보용으로 발췌한 꼭지 시 하나가 페이스북에서 좋아요 일만 개를 찍으면서 트위터에서도 수만 알티를 타고, 각종 커뮤니티 카페를 시작으로 반응이 오더니 이튿날에는 그 시가 실렸던 시집 1쇄가 동나버렸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교보문고에서 시인의 팬사인회가 진행되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모인 사람들의 면면이 하나같이 몹시 이상합니다. 인파 속에서 관찰 판정에 성공할 시 며칠 전 남산타워에서 유성우를 보도하던 기상 캐스터 역시 잔뜩 흥분하여 줄을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주변 사람들의 대화에 듣기 판정을 하거나, 뉴스를 자주 보는 PC일 경우 지능 판정 등을 통해 이 기상캐스터가 남산타워의 유성우 소식을 중계한 이후 갑작스럽게 잠적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쳤던 인물이라는 정보를 획득합니다.
KP 정보 기상캐스터는 유성우 소식을 보도한 다음날 ‘유진’의 시에 노출되었고 곧바로 광기에 빠져 모든 생업을 거절한 채 문학에 빨려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태도는 대단히 기이합니다. 마치 잘못 소집된 사이비 집단의 광신도들처럼 저마다 시집을 가슴에 안고 열에 불탄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두 퀭하고 마른 인상이며, 벽에 프린팅되어 붙은 시 앞에 줄을 서서 사진을 찍고, 성서를 인용하듯 그 문장들을 외웁니다. KPC와 PC 역시 시를 들여다봅니다.
투박하고 거칠게 다듬은 소리에 내가 파묻혀야 한다 썰물 몰려간 갯벌에 서서 다음 물때를 기다려야 한다 발등만 겨우 덮는 줄 알았던 파도가 목아래까지 간지럽힐 때, 아, 이미 늦었다, 빠져나가기 글렀다, 생각할 때,
안내방송을 들으려고 비행기를 탔다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겠지 밤을 두 갈래로 나눈다면 날짜변경선을 따라 왼쪽으로는 눈물을 훔치는 밤 오른쪽으로는 훔쳐 쓰는 밤이라고 이름짓겠어 신호도 없이 팔차선 도로를 건너는 마음 멀리 버려진 별 명왕성으로부터 가슴을 사르고 날아온 그리움 파지처럼 적신 옷 풀썩 빠지려고 작정을 한 다리, 빨아서 널어 놓은 목도리 틈으로 빛이 비칩니다 별 같네요
나는 백일 동안 백 편의 시를 쓰겠어 그애에게 보내겠어요 편지하기 위해 책을 출판한다면 또 무슨 소리를 들을까 나의 열병을 알고 있어? 내 유작은, 감정의 유작은, 생각의 유작은, 이 초겨울은……
뭐… 평범한 시입니다. PC의 성격이나 전공에 따라 집중하여 읽을 수도 있겠고, 감동을 받거나 감흥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저게 이렇게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라는 생각 자체입니다. 어리둥절해진 두 사람은 인파를 헤치고 사인회장 근처로 다가가게 됩니다. KPC를 통해 유도해 주세요.
KPC와 PC는 그 곳에서 처음으로 시인 ‘유진’을 만나게 됩니다. 유약하고 평범하며 조용한 인상인 그 시인은, 셀 수도 없이 몰려선 자신의 팬들에게 별다른 말조차 건네지 않습니다.
그를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이유도 없이 두근거립니다. 이것은 지문이 감정을 종용하기도 하는─ 지금 이 문장 바깥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배열되는 어떤 세계의 법칙과는 아주 다른 현상입니다. KPC와 PC 두 사람 모두, 심장 밑이 뻐근하게 당길 정도로 당황스러운 감정의 끌림을 느낍니다. 시는 평범하지만, 시를 쓴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눈썰미가 좋은 PC라면, 그가 묘하게 누군가를 닮았다는 사실을 눈치챌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쉬이 누구라고 떠올릴 수는 없습니다. 감정의 잔여는 오래 가만히 둔 잿물 사이로 가라앉은 침전물처럼 맴돌다 사라집니다.
KP 정보 닮은 것은… 당연히 KPC와 PC 두 사람입니다! KPC와 PC가 감정적 끌림을 느낀 대상은 정확히 말하면 유진이 아니라 유진이 가지고 있는 운석입니다. 두 사람과 명왕성이라는 근원이 같은 그것입니다.
청계천 : ‘새로 한점 반이나, 두점, 그러한 시각’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교보문고에서 스탬프를 찍고, 혼란한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두 사람은 청계천변을 걷기 시작합니다. 누구에게도 긍정적 반응을 얻어내지 못했던 소라뿔 조형물(*청계광장 분수대 초입에 있는 설치미술,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형태라 서울 시민들에게 반응이 좋지 못함)의 이름이 봄이라는 뜻의 ‘스프링’이라는 것을 아는 시민은 드물 겁니다.
첫 삽을 뜰 때의 소요가 어찌 되었든, 청계천은 서울 시민들의 좋은 쉼터로 기능하곤 합니다.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던 지하 서점을 벗어나 탁 트인 공기를 마시니 속이 시원해집니다. 오늘은 미세먼지도 없고, 하늘도 아주 청명한 가을과 겨울 사이의 어떤 날. 커피를 사들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도 좋고, 손을 잡고 걸어도 좋습니다. 적당히 즐길 만큼 RP해 주세요.
그런데 두 사람이 광교(*청계광장을 시작점으로 했을 때 청계천의 두 번째 다리)를 지날 무렵, 기묘한 일이 벌어집니다.
주변을 스치는 공기의 빛깔이 세피아빛으로 흐려집니다. 어찔하게 머리가 아득합니다. 눈앞이 시큰하고 가슴이 아립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사람이 많은 것은 이전과 같습니다. 그러나 잘 정비된 산책로와 도시 조형을 생각해 아낌없이 심겼던 이팝나무들의 낙엽, 빠르게 종알거리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따위가 전부 사라진 자리에 새롭게 보이는 것은 인공적으로 만든 유속 대신 발바닥이나 겨우 잠길까 싶은 유량. 본래 청계천은 강수량이 많을 때에나 물이 흐르는 건천에 가까웠다고 하죠. 진흙이 밟히는 천변, 멀리로는 낡은 판잣집들이 줄을 이었고, 가까이에는 양장과 한복이 기묘하게 섞인 복장을 한 행인들이 짐을 짊어지고 전차역을 찾아갑니다. 모던 보이들이 중절모를 올리며 코트자락을 휘날리고, 어깨 위에 설렁탕 그릇을 잔뜩 얹은 짐꾼이 한 손으로 자전거를 운전하며 육의전을 향해 거리를 가로지릅니다. 볏짚을 이어 만든 구시대의 초가집과 밤에도 불야성을 이루는 3, 4층짜리 건물들이 서로 자리를 해치며 혼란스러운 공존을 목적하는…….
기본적인 지식이 있는 PC라면 이 광경이 1930년대의 경성 거리라는 것을 별다른 판정 없이도 알 수 있습니다. 서울 역사에 대한 이해가 없는 PC라면 근처 가게에 걸린 달력 등 간접적 단서를 통해 알려 주세요.
그리고 두 사람의 시야에 어떤 남자가 잡힙니다. 동시에 어떤 다큐멘터리의 나레이션처럼 KPC와 PC의 뇌리에 아주 느리게, 선연한 발음으로 들려 오는 혹은 읽혀 오는 문장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늘 있을 수 없다. 어머니는 역시, 글을 쓰는 것보다는 월급쟁이가 몇 갑절 낫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그렇게 재주 있는 내 아들은 무엇을 하든 잘하리라고 혼자 작정해 버린다. 아들은 지금 세상에서 월급 자리 얻기가 얼마나 힘드는 것인가를 말한다. 하지만, 보통학교만 졸업하고도, 고등학교만 나오고도, 회사에서 관청에서 일들만 잘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또 동경엘 건너가 공부하고 온 내 아들이, 구하여도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것은 세상을 일구는 가장 근원적 논리를 설득하듯 부드럽고 가벼운 어조였습니다. 낡은 양장을 걸친 남자는 비틀거리며 천변을 따라 걷습니다. 아무런 목적도 없는 것처럼. 오래된 글을 쓰는 소설가의 가운뎃손가락이 으레 그러하듯 투박한 걸음걸이로. 경로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고, 남자는 다리 모퉁이에 섭니다. ‘일 있는 듯싶게 꾸미는 걸음걸이는 그곳에서 멈추어진다.’
PC가 이 텍스트를 알고 있다면, 혹은 KPC가 알아차린다면, 그들은 이 광경이 1930년대의 경성을 묘사한 문학 작품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속 한 장면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필요하다면 어떤 판정이든 주저 없이 실행하여 정보를 주세요.
이 뒤섞임은 일정 부분 ‘유진’의 원하던 바이기도 합니다. 오랜 후의 미래에서 이미 실전된 이 작품을, 유진은 2021년으로 내려온 직후 읽어 보고 필사하였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진실된 문학에 대해 타인과 대화를 나누거나 감상해볼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지 못했으므로, ‘문창성의 펜’의 힘을 빌어 문학 속 세계를 체험하고 스스로의 경험을 늘리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유진’은 ‘구보 씨’를 따라 걷고 있었습니다. 지극히 현대적인 복장을 하고, 자신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인물들 사이를 꿰뚫고 지나가며.
그리하여 마침내 이 멀고 가까워진 인연 사이에 가로놓인 ‘유진’과 KPC, PC는 눈을 마주치게 됩니다.
이 시대, 1930년대를 기준으로 하여 몹시도 부적절한 복장을 한 ‘유진’을 두 사람은 알아봅니다. 저 사람, 신드롬을 일으켰다는 그 작가잖아요. ‘유진’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놀란 기색을 합니다. 이곳에 자신 외의 인간은 없어야 하는데, 모퉁이를 돌았을 때 전혀 생각지 못한 풍경을 마주한 사람처럼. 이곳은 한 시대를 정초한 텍스트의 행간 사이이지 실제 역사나 사회가 아닙니다. 그러니 유령처럼 스쳐 지나가는 인물들 속에서 오로지 세 사람만이 명확한 테두리를 가지고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구보는 집을 나와 천변 길을 광교로 향하여 걸어가며, 어머니에게 단 한마디 ‘네―’ 하고 대답 못 했던 것을 뉘우쳐 본다. (...) 구보는 마침내 다리 모퉁이에까지 이르렀다. 그의 일 있는 듯싶게 꾸미는 걸음걸이는 그곳에서 멈추어진다. 그는 어딜 갈까, 생각하여 본다. 모두가 그의 갈 곳이었다. 한 군데라 그가 갈 곳은 없었다. 한낮의 거리 위에서 구보는 갑자기 격렬한 두통을 느낀다. 비록 식욕은 왕성하더라도, 잠은 잘 오더라도, 그것은 역시 신경쇠약에 틀림없었다.’
본능적으로, ‘유진’이 이 현상과 무언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인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KPC와 PC는 이해합니다. KPC를 통해 ‘유진’을 쫓아 뛰어가도록 유도해 주세요. ‘유진’은 겁에 질린 듯 뒤를 돌아보며 인물들 속으로 파묻힙니다. 광교를 거꾸로 거슬러 종로 거리를 뛰어갑니다. 그리고 다시 아찔한 동통 뒤에, 정신을 차려 보면 두 사람은 2021년 현재로 돌아와 있습니다. 알 수 없이 거대하여 한 눈으로는 전체적인 형태를 다 들여다볼 수도 없는 우주적 공포에 질린 감각이 뇌리를 때립니다. 이게 다 무슨 일일까요? 두 사람은 도대체 무슨 경험을 한 거죠?
누가, 우리의 머릿속에서 이제는 연구적 목적 외에는 잘 읽히지도 않는 텍스트를 읽어 주고 있나요? 이성 판정 1/1D3
‘구보는 고독을 느끼고, 사람들 있는 곳으로, 약동하는 무리들의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생각한다.’
학림다방,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 버렸네 (*박건, <지금도 마로니에는>)
며칠이 흐르는 동안, 문학 신드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유진’의 시, 문창성의 펜으로 작성된 작품들이 서울 여기저기 전시되면서 사람들은 그것에 사로잡히고, 슬픈 광기와 집착에 물들어 문학을 신봉합니다. 시민들은 출근을 거부하고 책에 빠져들고, 뉴스 보도는 연일 대체인력으로 돌아갑니다. 지방에서는 서울의 이상현상을 보도하기 시작합니다.
기묘한 일에 휩쓸렸던 며칠 전의 기억 가운데 햇살이 황금빛으로 산란하는 저물녘, 이 시간, 아직 바깥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지만 날은 점점 저무는 순간의 황혼을 사람들은 ‘시민박명’이라고 부릅니다. 수천 명의 시인들이 일만 년동안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서울. 이번 스탬프 투어 스팟인 이화동 벽화마을을 걸어 내려온 두 사람은 대학로의 명소인 학림다방으로 향합니다.
바로 이 자리에 머물러 몇백 년간 치열한 토론과 지식의 보고가 되었던 장소에서, 학림다방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채 잠잠하고 고즈넉히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을 열었을 때에, 두 사람은 자리를 잡기도 전에 곧바른 통증을 느낍니다. 그 아찔한 어지러움은 보고 싶은 사람을 쉽게 마주하지 못할 때 느끼는 그리움과도 닮아 있습니다. 세상은 다시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지직거리며 묘한 갈빛으로 젖어듭니다.
아직 서울대학교가 동숭동 캠퍼스에 문리대를 두었던 시절이므로 학생들이 학림다방을 차지한 것은 당연하지요. 우리의 시대에는 유행하지 않는 강렬한 색채의 옷차림, 커다란 잠자리 안경, 옛스러운 통기타. 이 아름다운 도시는 일종의 전거로 남아 우리의 마음에 빚을 지웁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여기 이 자리에서 있었던 모든 토론과 입 말라 목쉰 새벽이 2021년의 민중 자유를 이룩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이 곳은, 김영일과 김중태가 시문학을 논하고, 천상병이 골목길 어귀를 지나며, 전혜린이 차분한 필붓으로 독어를 번역하는 1960년의 어느 한 순간. 벽에 걸린 날짜형 달력은 KPC와 PC에게 지금이 몇 년도인지를 정확하게 알려 줍니다.
다시 그들의 뇌리에만 들리는 목소리.
고작 멋을 부린 거라곤 친구 손에 들린 제비꽃이 전부였지. 그런데두, 그 신랑신부는 무척 행복해 보였어. 시종일관 미소를 띤 채 틈만 나면 키스를 해 대는 거야. 그때 난, 그 제비꽃에서 희망을 봤어. 한낮의 태양보다도 더 뜨겁고, 밝게 떠오르는 희망. 그런 느낌을, 난 영일이 네 분홍색 구두에서 찾았어. 가난은 언젠가는 극복되는 거야. 하지만, 한 번 잃어버린 꿈과 희망을 다시 찾기는 힘든 거야. 그걸 이곳을 드나들던 예술가들은 알았던 거지. 그래서 가난했지만, 낭만을 노래했구. 그렇게, 그렇게 힘들게 지켜 온 낭만인데. 그걸 배고픔을 해결해 준다구 군인들한테 홀딱 넘어가서,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지금도 마로니에는>, EP 009)
그리고 시선 끝에 그가 있습니다.
‘유진’은, 이번에는 놀라지 않고 차분하게 테이블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펼쳐 둔 노트에는 다정한 글씨로 무언가가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그는 KPC와 PC를 불러 맞은편에 앉힙니다. 처음으로 대화가 이룩됩니다.
“그날 청계천변에서 마주쳤지요?”
KP 정보 이 시점의 ‘유진’은 KPC와 PC에 대해 별다른 정보를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두 사람이 어째서 자신의 힘에 휩쓸리지 않고 이성을 유지하는지, 자신만이 체험하려던 문학 속 세계에 왜 두 사람까지 함께 들어왔는지 알지 못합니다. 때문에 줄 수 있는 정보가 별로 없고, 다만 두 사람과 대화를 통해 단서를 획득한 후 계획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KPC와 PC를 해치려는 목적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왜 다른 사람들처럼 이 힘에 휩쓸리지 않고 이성을 유지하고 있을까요? 어째서 이 텍스트 속에 당신들마저 떨어졌을까요? 이유를 모르겠군요…….”
‘유진’의 한국어는 대단히 이상했습니다. 지나치게 매끄럽고, 바르게 정서되어서, …마치 죽은 언어를 발음하는 것 같았지요. 문득 우리는 또다른 죽은 언어에 대해 떠올립니다. 라틴어는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죠. 그것이 바티칸의 공식 언어로 채택되었을 무렵에는 이미 고정되고 사멸된 언어였기 때문에.
‘유진’은 그 죽은 말을 이어 나갑니다.
“나는 이 시대가 좀 다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곳 역시 예술이 사라진 세계만큼 빈한하고, 거칠며, 다정하지 못하군요. 사람들은 잠깐 씹을 거리처럼 문장을 대했어요. 그래도… 아직은 많이 남아 있지요. 내가 볼 수 있는 것들이. 그것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일인지…….”
그리고 ‘유진’은 갑작스레 흉기를 빼들어 두 사람을 해치려 듭니다. 필요하다면 전투나 대항 판정을 거쳐도 좋습니다. 그러나 어떤 억지력이 기능하여, 흉기가 KPC나 PC에게 꽂혀들기 직전 파작거리는 불꽃이 튀며 타들어 사라집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도록 놀란 ‘유진’은 벌떡 일어섭니다. 시공관리국 요원인 ‘유진’은 이 현상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뒤바꾸면 본인의 존재 자체가 모순이 되어 버리는 사건 앞에서, 세계는 당연한 억지력을 선사한다는 것을.
KPC나 PC가 죽으면, 존재적 모순이 벌어진다고? 그러면, 이 사람들은 나와 관계가 있다는 거야? 몹시 당황한 유진은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미처 소지품을 다 챙기지 못하여 필사 노트를 두고 갑니다. 유진이 멀어짐과 동시에 세계의 색채는 다시 변해 그들은 2021년 현재의 학림다방으로 돌아옵니다.
필사 노트
노트를 뒤져 보면 다음 작품들의 필사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박태원,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 이상, <날개>
- EBS드라마 <지금도 마로니에는>
- 한용운, <알 수 없어요>
- 박완서, <나목>
가장 중요한 사실은 KPC와 PC가 체험 중이던 서울시 스탬프 투어 팜플렛과 함께 그 경로가 그대로 메모되어 있었다는 정보입니다. 그동안 ‘유진’과 경로가 겹쳤던 것은, 그리고 그럴 때마다 기이한 일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유진’을 다시 만나는 것이 서울의 이상현상을 해결하고 이 기묘한 현상의 해답을 찾는 길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의견을 모을 수 있도록 KPC를 통해 유도해 주세요. 서울시 스탬프 투어의 다음 장소는 연남동 경의선 숲길, 그리고 명동 일대입니다. ‘유진’도 이유는 모르겠으나 이 경로를 따라 움직일 거예요. 그러나 다음 장소가 연남동이라는 걸 안다고 해도, 그 넓은 연남동에서 매일 ‘유진’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때 맞은편에서 이런저런 검색을 해 보던 KPC가 정보를 줍니다. ‘유진’이 다음 주, 합정 근방의 갤러리에서 시문학 전시회를 연다는 것입니다. 작가가 직접 방문한다니 그곳으로 가면 ‘유진’을 만날 수 있겠죠. 마침 연남동과 거리가 멀지도 않으니 두 사람은 합정 모처의 갤러리로 향할 계획을 짭니다.
합정 :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 (*마포종점)
이제 대다수의 서울 시민들은 생산활동을 그만두고 오로지 문학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노동자들은 노동을 오로지 문학을 구매할 수단으로 여기고, 각종 포럼과 문학 동아리 등이 폭발적인 반응을 끌며 정체되었던 문학 연구가 터져 나옵니다. 모든 뉴스의 꼭지는 이달의 신작과 그간 외면되었던 다양한 문학 작품 소개로 뒤덮입니다.
쏟아지는 소식 속에서 전시회 날짜가 되고, 지하철은 서울 시민들의 애환 서린 당산철교를 건너 난연한 박명 속을 가로지릅니다. 차가운 공기는 철도 바깥에서 넘실거리고 한강을 거스르는 윤슬들은 저마다 가장 힘을 주어 쓴 시의 구절처럼 반짝이며 흔들립니다. 이윽고 합정역.
그러나 도착한 갤러리에 ‘유진’은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며 갤러리 안으로 몰려들고, 전시된 작품들을 제 목숨인 것처럼 귀히 여기며 사진으로 남깁니다. 제어되지 않는 광신도들처럼 빽빽히 들어찬 관람객들. 그 사이에서, KPC와 PC는 정상적이기에 이질적인 어떤 사람들을 목격합니다. 한 노부부였습니다.
그 노부부는 새파랗게 질렸기에 현실감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미쳐 날뛰며 문학을 양분 삼아 삶을 꾸려 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직 그들만이 KPC와 PC처럼 쉬이 휩쓸리지 않고 이 상황을 공포에 질린 채 바라보고 있습니다. KPC와 PC는 학자 부부와의 대화를 통해 다음 정보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 노부부는 각각 천문학과 생물학을 전공하였다.
- 부부의 가족은 출판사를 운영하는데, 그 출판사는 ‘유진’의 시를 처음으로 출판한 곳이다. 노부부는 이러한 경로를 통해 ‘유진’의 시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최초의 인물들이다. 가장 먼저 정신이 나간 사람들이 ‘유진’의 시를 처음 출판한 출판사 직원들이기 때문이다.
- 서울에 아직 이 기이 현상에 휩쓸리지 않은 사람들이 몇 명 더 있다. 우리가 그렇듯이. 우리 사이엔 분명 어떤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 편집자를 통해 들은 정보인데, ‘유진’은 반드시 특이한 만년필과 잉크를 사용하여 시를 쓴다고 한다.
- 종로를 본사로 하는 해당 출판사에 들렀다 ‘유진’을 만난 적이 있고, 문학 작품 속에 휩쓸린 경험이 있다. 그들이 빠져든 작품은 이상의 <날개>.
그 말을 듣고 학림다방에서 획득했던 필사 노트를 살펴보면, 과연 반짝이는 펄이 들어간 잉크로 쓰인 글씨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KPC와 PC가 노부부와 필사 노트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서울 스탬프 투어와 경로가 겹친다는 것을 전달해 주어도 좋습니다. 두 집단 사이에서 정보가 공유되고, ‘필사 노트’를 확인한 학자 부부는 이 노트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고 싶다는 의견을 밝힙니다. 연락처를 교환한 후 노트를 빌려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세요. 학자 부부는 새로운 정보가 생기면 연락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연남,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한용운, <알 수 없어요>)
이제 스탬프 투어는 연남동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주택가 한복판에 조성된 이 숲길은 대로를 건너 저편에서 젊음의 거리라고 지칭되는 홍대 청춘들과는 다소 다른 분위기를 지닙니다. 가정적이고 따뜻한 풍경, 미처 시들지 않고 커다란 낙엽을 떨구는 플라타너스와 은행나무가 금빛 풍취 속에서 잔물결 같은 잎을 떱니다.
천천히 거리를 걷던 두 사람은 문득, 이 숲길이 지나치게 한적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관계 없이 이 시간이면 산책하는 사람들로 무수하던 거리가 조용하고, 곁의 아파트들이 찬연한 불빛을 무심하게 반짝이고 있습니다. 모두 틀어박혀 책이라도 읽는 거겠죠. 유사 이래 문학이 이토록 존숭되고 사람들이 텍스트와 행간의 힘을 믿게 된 일이 있었나요? 이것은 기꺼운 일일까요, 파훼되어야 하는 일일까요?
잘 관리되지 않은 길거리에는 쓰레기가 나뒹굴 법도 한데, 외출을 삼가고 직독에만 파고드는 사람들 탓에 이곳에는 오염조차 없습니다. 차량의 방해, 인파의 방해 따위도 받지 않고 길을 걷다 보면 거리에 전시된 액자 하나에 눈길이 닿습니다.
이것은, 그간 몇 차례 연남동을 산책한 적이 있는 PC라도 이전에는 발견한 기억이 없는 액자입니다. 그럼에도 액자는 이곳에서 오래 비바람을 맞은 것처럼 얼룩지게 낡아 있습니다. 두 사람은 그것을 들여다봅니다.
가문비나무 관목이 햇살을 받았을 때에 은색으로 반짝이는 빛을 발하듯이, 은은하게 아름답고 뱅글뱅글 돌면서 꿈틀거리는 그것. 익숙한 아찔함과 통증이 몸을 내달립니다. 세상의 제약과 규칙을 모두 벗어난 색채가 두 사람을 감싸 휘몰아칩니다. 따스해진 공기는 조명 아래의 보석이 춤을 추듯 부드럽게 움직이고, 비취와 옥으로 조각한 듯한 들풀이 여린 숨결을 내뱉습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 지리한 소나기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 그 사이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향기.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며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 (*한용운, <알 수 없어요> 인용하여 변형) 다시 들리는 문장, 문장, 문장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이 경험은 ‘유진’의 필사본에서부터 비롯된 것임과 동시에, 하스투르의 교단이 준비한 액자 속 ‘황색의 징표’와 마주하면서 벌어진 일입니다. 따라서 이성 판정 0/1D6, 이후 룰북(p.314)의 규칙에 따릅니다.
명동, 매듭을 짓고 싶은 눈치가 역력한 그녀에게 (*박완서, <나목>)
연남동과 합정에서는 ‘유진’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약속도 하지 않은 주제에 미리부터 마주쳤던 전번의 경험과 달리 그는 자취를 감추고 도통 소식이 없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명동, 마침 필사본에 남은 작품인 <나목> 역시 명동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요.
며칠 뒤, 합정 갤러리에서 마주쳤던 노부부에게서 연락이 옵니다. 전화 통화를 통해 다음 정보를 획득합니다.
- ‘필사 노트’에 쓰인 잉크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 좀 더 알아보니, 이 물질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구성 요소는 탄화수소. 그러나 지구의 것과는 양상이 다르다. 이것은 운석에서 흔히 발견되는 구조.
- ‘유진’의 이전 행적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는 갑자기 출판사에 나타났으며, 갑자기 작품을 투고했고, 그때부터 세상에 떠올랐다. 이정도로 유명세를 탔다면 동창의 증언이라도 한 마디 나올 법한데 그런 것이 전무하다.
- 친분이 있고 마찬가지로 이성을 유지 중인 경찰 관계자와 이야기를 해 보았는데, 서울시 스탬프 투어에 참여한 사람들이 이상증세를 호소하며 입원한 기록이 많다고 한다. 이것은 문학 신드롬과는 궤가 다른 증상이다. 대부분이 이 세상에 있지 않은 존재에 대한 악몽을 꾸고, 우주 먼 곳에 있다는 도시 ‘카르코사’를 묘사하곤 한다.
- 두문불출하던 ‘유진’이 오늘은 편집자와 회의가 있어 명동으로 외출한다고 한다. 마침 필사 노트의 행적과도 일치하니, 방문하여 유진을 붙잡거나 단서를 획득하는 게 어떨지?
- …그런데, KPC와 PC를 만나고 며칠간 든 생각이 있다. ‘유진’은 당신들을 닮은 것 같다…….
‘운석’이라는 키워드를 들은 KPC는 ‘그러고 보니, 이 문학 신드롬이 시작된 것은 명왕성 유성우가 떨어진 직후부터가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합니다. KPC 제시 없이 PC의 지능 판정 등을 통해 짐작하게 해 주어도 좋습니다.
몇 가지 혼란스러운 추측 속에서 두 사람은 명동으로 향합니다.
굳이 다른 문제 탓이 아니더라도 예전에 비해 발걸음이 많이 줄어든 명동 거리는, 수백 년 도읍 역사 속에서 명실공히 중심지로 자라 왔던 과거와 달리 이제 전과 같은 구색을 갖추지 못합니다. 문학 신드롬과 관계 없이 명동을 찾아드는 서울 시민은 매년 감소 추세였고, 도심 공동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사람들이 떠나간 발자취를 메운 것은 관광객들 뿐입니다. 심지어 요 며칠 사이에는 그들조차도 찾아보기가 힘들었습니다. 모두 상점 문을 닫아걸고 책에만 몰두했으니까요. 공사 문제를 두고 다투던 건물주들도 싸움을 멈루고 옛 도서들을 어루만지며 눈물짓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찌나 친절한 세계입니까? 오직 읽기로만 자신의 감정을 분출하고, 원고지 위에 버려져 있다 비로소 생명력을 갖춘 문장부호들은 얼마나 거센 방식으로 맥동하겠습니까?
마치 어떤 힘에 이끌리듯이, 두 사람은 거리 저편에서 ‘유진’을 발견합니다. 멀리서 서로 신호를 발하는 장치끼리 다가설수록 붉은 빛을 번쩍이는 현상처럼 심장이 강하게 움직입니다. 저곳에 나의 마땅한 근원이 있을 것 같습니다. KPC와 PC가 ‘유진’을 쫓아 달릴 수 있도록 유도해 주세요. ‘유진’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다시 세피아. 찌르는 듯한 두통. 조근조근한 목소리가 머리에 울리고, 이제 두 사람은 그것이 ‘유진’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곳은 전쟁 중의 명동 거리. 발목이 보이도록 깡똥한 치맛자락을 붙잡고 명동 성당 방향을 향해 바쁘게 움직이는 저 여자는 <나목>의 주인공 이경.
아직 치워지지 않은 크리스마스 트리는 더덕더덕 금종이 은종이를 걸친 채 쉴 새 없이 붉고 푸른 윙크를 보내고, 양키들이 둘러멘 트랜지스터에서 목쉰 소리가 <파피 러브>를 부르고, 이런 것들이 조금도 싫지는 않았으나 이런 것들 때문일까 마음이 좀처럼 차분해지지를 못했다. 마주보이는 ‘캔디 카운터’에서 다이아나가 미군에게 과자를 팔고 달러를 셈하고 그럴 때마다 무명지에서 다이아가 번쩍댔다. 꼭 다이아를 위해 마련된 것 같은 섬세하고 어여쁜 손이었다. 그녀가 별안간 팔꿈치를 쇼케이스 위에 고이고 손바닥에 이마와 머리카락을 한꺼번에 파묻고 잠시 쉰다. 그녀는 곧잘 그런 모양으로 쉬었다. 움켜쥔 검은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빨간 손톱과 다이아가 엿뵈고 그것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다웠다. 저런 멋진 포즈로 돈 말고 좀 딴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나는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정신력 판정을 성공할 때까지 시도하며, 실패할 때마다 이성 판정 0/1D2를 진행합니다. 눈앞이 아뜩하지만 그것을 떨쳐 내려고 노력하십시오. 이제는 저 사람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문장들의 폭력적 흐름 속에서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유진’과 얽힌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민첩 대항을 실시해도 좋고, 추격 진행을 해도 좋습니다. 복잡한 거리를 뛰어 ‘유진’을 붙잡아 주세요. 손목이 붙잡힌 그는 놀라 두 사람을 뿌리치려 하고, 그 와중에 들고 있던 가방이 떨어지면서 안에 감추어 두었던 상자가 큰 파열음을 내며 바닥을 구릅니다. 가능하면 PC의 손으로 그것을 줍게 해 주세요.
안에 든 것은 기묘하게 생긴 암석입니다.
이것을 만지고 싶습니다.
가슴에 안고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분리된 지금의 상태가 잘못인 것 같습니다. 떨리던 손이 절로 암석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약동하는, 부서지는, 최초의 기억.
그것은 일종의 정언 명령처럼 암석을 쥔 손끝을 타고 심장을 거슬러 뇌까지 오르는 기억. 장면은 수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쩌면 수억 년 전일지도 모릅니다.
이 우주에 존재하게 된 가장 첫 순간에, KPC와 PC는 아프도록 조그만 존재였습니다. 명왕성 위를 구르는 작은 조각이었지요. 창공을 떠다니던 질소와 엷은 황색 대기를 올려다보며, 이 아득한 곳에 버려진 얼음별을 단둘의 지붕으로 삼아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폭발과 함께, 지구로부터 태양까지의 거리보다도 39배 먼 경로 동안 불타 쏟아지며 우리는 마침내 이 푸른 행성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리고 들풀이 되었다가, 민들레 홀씨가 되었다가, 작은 물고기였다가 거대한 새였다가, 새가 토해 놓은 흙이었다가 수증기였다가 먼지였다가… 엷은 산소였다가, 비로 내렸다가, 이윽고 의식을 갖추어 인간이 되었을 때에, 우리는 과거의 기록이나 기억이 없이도 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류가 공통적으로 첫 발음을 양순비음으로 내는 것과 같은 이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인연을 쌓아 나간 시대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지요. 어떤 삶에서는 서로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시간이 흘러서, 지금, 여기. KPC와 PC.
우리는 왜 수만 년을 거슬러 지금 함께하고 있을까요? 같은 명왕성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르는, 이 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왜 하필 당신일까요?
서로에게 유일해지는 것은, 소중해지는 것은, 마음으로 깊이 애정하고 사랑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지요. 명왕성으로부터 지구로 날아온 첫 존재를 기원 삼는 사람들이 오직 KPC와 PC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근원이 같다면 끌리기야 쉽겠지만, 그것이 필연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거대한 텍스트의 범람 속에서 서로를 고른 것은 오로지 서로의 몫.
어떤 거대한 질의가 들립니다. 어쩌면 스스로 발화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공통된 명왕성에서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한다는 거예요?
누군가 답합니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사랑은 선택이고 우리의 의지예요. 중요한 것은 운명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었다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도 보았잖아요? 수많은 전생에서 당신들이 반드시 연인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너무나 먼 시간을 건너서 우주적 이해를 거친 KPC와 PC는 이성 판정 1/1D5를 진행합니다.
다시 아득한 두통과 함께 두 사람은 현실로 돌아옵니다. 아니, 정확한 현실은 아닙니다. 여전히 전쟁 중의 명동이니까요. 서울이 수복된 직후라 도시에는 아직도 폭격의 흔적이 있습니다. ‘유진’은 여전히 우리의 손아귀 안에 잡혀 있습니다. 안색이 새하얘진 그는 우리와 꼭 같은 표정을 합니다. 잠깐, 안색이 새하얘진 게 맞나요? 손에 쥐인 ‘유진’의 손목이 반투명하여 뒤가 비칩니다. 지우개로 반쯤 지워 놓은 사람처럼, 흩어질 것이 예비된 사람처럼 그는 저 홀로 온전치 못합니다. 그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떨어집니다.
“당, 당신들을 해치려고 했어. 그런데 되지 않았어. 이제 나는 그 이유를 알아.”
그리고 ‘유진’은 비로소 자신의 존재에 대해 밝힙니다. 자신이 인류가 절반쯤 소멸한 먼 미래에서 왔다는 것, 그 시대에는 문학이 사멸되고 누구도 아름다운 시어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 운석에 깃든 힘을 이용해 사람들이 문학을 숭배하도록 만들자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
“내가 온 시대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인구수를 도로 늘리는 거예요. 인종적 다양성을 위해 연구자들은 때로 죽은 사람들의 DNA까지 채취하곤 했죠. 정말 위급한 상황이 닥쳐왔을 땐 그것을 합성해서 새 배아를 만들어내기도 해요. 나는 그렇게 태어났어요. 그러니 나는 가족의 정도 모르고, 괴로울 때 의지할 수 있는 대상도 몰라요. 그러니 읽기라는 것은 얼마나 친절한가요? 문장에 몰입한다는 건 현실과 유리된다는 뜻이지요…….”
울음 속에서 더듬거리던 ‘유진’은 말을 이어 나갑니다.
“시간여행에는 여러 제약이 따른다는 것쯤은 당신들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내가 길 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아 해치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아. 하, 하지만, 나의 존재와 관련된 것이라면… 만일, 누군가를 잡아서 죽였는데, 그 사람이 실은 나의 어머니였다면 바뀐 미래에서 내 존재는 어떻게 되겠어요? 아무도 알, 알 수 없겠죠… 그러니까, 당신들을 해칠 수 없었다는 건, 나는, 당신들은…….”
언어가 필요치 않은 순간들. 문자가 사람에게 가지는 깊은 보고들. 이 순간의 서울은 글자로 직조된 모든 것들에 다정합니다. 연인들은 시에 열광합니다. 문학의 아름다움을 숭배하고, 그것을 깊이 이해하며, 앞다퉈 더 면밀한 골조를 가진 문장을 만들기 위해 애씁니다. 이곳은 수백 년의 시간을 돌아 비로소 ‘유진’이 만들어낸 가장 따뜻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세계……. 하지만 그게 진실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유진’은 뒷말을 잇지 않은 채 울음 속에서 만년필을 꺼냅니다(‘문창성의 펜’ 입니다). PC는 ‘유진’의 대사를 통해, 그리고 자신과 너무도 닮은 그의 얼굴, 숨소리, 버릇을 통해 ‘유진’의 모체가 된 유전자가 바로 KPC와 PC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판정 등을 통해 깨닫게 해 주어도 좋고, 모른다면 모르는 대로 넘어가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유진’이 수첩을 꺼내 펜으로 무언가를 휘갈겨 쓰려 한다는 것입니다.
‘유진’의 생명력까지 빨아먹기 시작하여 거대한 힘을 갖춘 펜─운석의 힘은, 이제 ‘유진’이 작성하는 문장을 실체화시킬 수도 있을 만큼 강력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유진’은 쓴다: 나 사라져 흩어질 때까지 오직 이곳에 존재케 하소서.
그것은 인간의 의지가 쉽게 개입하거나 막을 수 없는 일입니다. 글쓰는 자의 사고는 눈을 깜빡이거나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히 하나의 흐름을 가진 문장 되어 뇌리를 스칩니다. 그것을 옮겨 적는 일이 비로소 글쓰기이므로 근본적으로 작문이란 오로지 생각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
“나는… 내가 만들어낸 이 세계가 유지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길 바라요. 미래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그 시대는 너무 공포스러워, 나는 가족도 친구도 없고 사람들은 따뜻한 문장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해요. 봐요, 나, 투명해지고 있죠. 맞지 않는 시간대에 너무 오래 머무르면 누구나 이렇게 변해 가다 결국은 소멸해 버려요…… 그러니 나를 놔 둬. 막지 마, 내가 사라져버릴 때까지라도 이곳에 존재하게 해 줘요.”
이제 KPC와 PC는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여러 가지 길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운석을 부수고 펜을 꺾으면 ‘유진’이 만들어 낸 문학 신드롬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유진’을 설득해 미래로 돌려보내도 좋고, 전투를 거쳐 강제로 빼앗아도 좋고, 심지어 ‘유진’을 죽이더라도 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들 모두가 최초로 비롯된 것은 명왕성이고, 그리하여 서로에게 끌렸으나, 결국 사랑한 것은 서로의 선택이듯이 이제 다시 운명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
이 부분을 적어내려가는 것은 오로지 활자 너머 여러분의 몫입니다. 한 이야기를 창조하고 판정과 묘사를 거쳐 마침내 결말을 이끄는 당신들을 우리는 수호자와 탐사자라고 부릅니다. 생각해 봅시다. 언어로 기술된, 가장 강력한 문장이 무엇일까요? 수없이 읽혔으며 무수히 되풀이되어 누구나 그것을 알고 있는 단 하나가 무엇일까요? 그것만이 ‘유진’의 문장을 이길 수 있습니다…….
KPC와 PC의 선택에 따라, ‘유진’은 상황을 수긍하고 미래로 돌아가거나, 죽어 없어지거나, 혹은 사라질 때까지 잠시간 이곳에 남아 서로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사실 ‘유진’의 수명은, 미래로 도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고작해야 이 시대에 하루도 더 머물지 못할 정도로 이미 연약해져 있기에 원한다면 하루의 유예를 주어도 좋습니다. ‘유진’이 어떻게 되든, 그는 마지막에 간신히 팔을 내어 두 사람을 껴안습니다. 그리고 속삭입니다.
“안녕, 나의 첫 어머니…….”
그리고 ‘유진’이 사라지거나, 돌아가거나, 죽는 순간부터
문학 속의 세계는 아주 천천히, 느리게 허물어지기 시작합니다.
이곳이 비록 활자에 기인한 세상이라 한들
한 우주가 쇠망하는 것은 너무나도 느려서, 한나절을 모조리 필요로 했습니다.
두 사람은 수만 년 전의 한 버려진 별에서 그러했듯, 손을 잡고 언덕에 앉아 쇠락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서로의 기원에 대한 것도 좋고, 어째서 서로가 서로를 선택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것도 좋고… 왜 우리의 사랑이 남들보다 유독 유별난 것으로 느껴지는지, 사실은 다른 모두의 형태와 비슷할텐데, 에 대한 것도 좋습니다.
그것이 이 오래된 문학의 결말입니다.
손을 잡고 걸어 나가, 현실로 돌아갑니다.
후기
세카이계 사랑하는 취향 버려야 되는데…….
퀄리티와 타협하고 싶지 않아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써내려갔지만 결국 스스로 다소 아쉬움이 남는 시나리오가 되었습니다. 추후에 수정할 가능성이 크니 책은 소장용으로만 생각해 주시고, 시나리오의 빈 곳은 여러분들께서 완성해 주세요. 저도 더 보완하여 배포하겠습니다.
서울을 언제부터 사랑하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헤아릴 수 있는 기억의 순간순간마다 저는 도심 한중간에 서서 이 아름답지만은 않은 도시의 색채를 무엇보다도 강렬히 받아들였습니다. 단순히 태어나고 자란 도시에 대한 기본적 애착을 넘어서는 어떤 열렬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울이 사람이었다면 청혼했을지도 몰라요. 더 많은 서울 이야기를 하려고 마음먹었어요.
정말 쓰기 힘든 시나리오였기에 개인적으로 평소보다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노력하여 더 다듬겠습니다. 괴로워 죽으려고 할 때마다 도와주신 D님, H님, S님, G님 감사드립니다. 사랑합니다!
언제나 아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이야기의 전거가 되어 준 사랑에게 고맙습니다. 당신에게 바칩니다.
이 아름다운 도시에
불빛이 푸르게 춤추고
기타 두 개와 스탠딩마이크 스피커 밑의 담뱃갑이 있고
어떤 공통도 없는 노래를 들으면서 나 널 기다려
달이 싯누렇고
노랫말에 집중하는 목소리가 있는데
내가 기다리는 것이 너뿐이지
이 밤 서울 불빛이 푸르고 기타 두 대와
수많은 노래와 행인과 담배 연기 있는데
가을 쌀쌀한 이 밤 강물같은 노래들 별처럼 뜬 가로등 넘쳐나는 소재 속에
너 아니면 내가 취할 것이 없어서
알고 있어? 오늘 새벽엔 유성우가 내릴 거야
이제와 생각하니 저것은 우리 사랑과도 퍽 비슷해
껴안고 불타 망설임없이 내던지는 몸꼴이 닮았지
안녕, 안녕 나의 혜성 같은 소년
나 눈발 아래서 너를 기다리고 있어
모든 가로등은 종종 너의 모사로구나 깨달으면서
애가 탄다는 말은 흔하고
설렌다는 표현은 상투적이지만
습관처럼 쭉 그랬기에
이제는 대체어도 찾을 수 없는 사랑 여기 있어
아, 그리고 비로소
멀리로부터 너 달려올 때에
너
너를
너에게
너여야만
너여서
너로
너
너
네가 달려올 때에
마침내 눈길을 지르밟으면서, 안으면서, 널 기다렸어 너를 원했어 우리 사랑하고 있어
속삭여줄 때에
어서와 사랑하며 기다렸어
다가와 널 안으면서 날 안으면서
참고문헌
류신,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민음사, 2013)
방민호, 『서울 문학 기행』 (아르테, 2017)
임치균, 김인회, 홍현성, 『보은기우록: 현대어본』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9)
정도환, 『표지석 따라 걷기』 (큰그림, 2021)
화화스튜디오, 『한국 판타지 아이템 도감』 (화화스튜디오, 2021)
언어는 생각의 감옥인가? 사피어·워프 가설에 대하여, 한국일보, 2007.2.6
김종수, 일제강점기 경성의 출판문화 동향과 문학서적의 근대적 위상 – 한성도서주식회사의 활동을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35, 2009.
김백영, 일제하 서울에서의 식민권력의 지배전략과 도시공간의 정치학, 서울대학교, 2005.
최혜실, 한국 현대 모더니즘 소설에 나타나는 ‘산책자’의 주제,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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